디캔터의 힘. by NeoType

안녕하십니까, 네타입니다.
오늘은 제가 쉬는 날이라서인지, 그리고 아침부터 술병을 비우고 있다보니 어쩐지 굉장히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꽤나 블로그 관리도 뜸했으니 쉬는 날이면 조금씩 글을 쓰는 쪽도 계속 해보려 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것은 와인 도구의 하나인 디캔터(Decanter)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진의 가운데에 있는 넓은 바닥과 좁은 입구를 가진 병이 제가 가진 디캔터입니다.
나름 10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고가이고 이 디캔터를 구입한지는 거의 4년 이상은 되었습니다만 사실 이제까지 이걸 제대로 이용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었습니다. 이유라면 일단 번거롭다는 점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걸 써야 할 정도로 퀄리티가 있거나 까다로운 와인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웬만한 와인들, 특히 흔히 자주 마시는 칠레나 호주, 미국의 웬만한 중저가의 와인들은 굳이 디캔터를 쓸 것 없이 병을 개봉하자마자 자신의 맛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많고, 극히 일부도 병을 따서 약 10분 내외면 어지간해선 맛이 풀려나, 즉 "맛이 열려서" 마시기 좋은 상태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디캔터라는 물건은 꽤 유명하지요. 특히 일본의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여기서의 디캔터의 묘사는 말 그대로 모든 와인의 맛을 좋게 하는 "마법의 병"이자 거의 모든 와인에 디캔터를 이용하는 장면이 나와 "모든 와인은 디캔터를 써서 마시면 맛이 좋아진다."라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어지간한 중저가의 와인에는 거의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작중에 묘사되는 와인들은 대부분 프랑스의 보르도 그랑크뤼 1급인 "5대 샤또"를 비롯한 그랑크뤼 2~5급을 왔다갔다하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며 퀄리티가 상당히 높은 이름 있는 와인들이 대부분이지요. 거기다 사실 디캔터를 사용하는 장면도 이러한 고가이자 와인의 포텐셜이 높은 와인들을 마실 때만 주로 나오고 웬만한 와인들은 디캔터 없이 그냥 바로 마시는 경우도 많이 나오지요.

일반적인 중저가의 그냥 병을 따서 바로 마시기 좋은 와인들은 이 디캔터에 옮기면 거의 대부분 신맛만 강조되는 경우도 있고 매우 밍숭밍숭한 와인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와인을 따서 일단 조금 마셔보고 이걸 디캔팅할지 아니면 그냥 마실지를 정해야하는데 이건 사실 경험으로 결정하는 일이라고밖에 못 하겠군요. 일단 많이 마셔보고 이것이 어떤 맛일지, 그리고 어떤 맛으로 변해갈지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지 않으면 꽤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굳이 이렇게 디캔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사진에 나온 저 와인 덕분이라 할 수 있는데, 저는 이 와인처럼 디캔터를 썼을 때 이렇게나 맛이 확연히 달라지는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샤또 뻬이르 르바드(Chateau Peyre-Lebade)라는 이름의 프랑스 와인으로, 보르도 오메독(Haut-Medoc)에 위치한 포도원에서 생산되는 와인입니다. 유명한 1급 샤또인 샤또 라피트 로쉴드(Chteau Lafite Rothschild)의 보유 포도원의 하나로, 병에 표기되어 있듯 크뤼 부르주아(Cru Bourgeois)급 와인입니다. 현재 저희 매장에서 2만 9천원 가량에 판매하고 있습니다.(...본격 간접광고;)

보르도의 1급부터 5급까지의 와인 등급은 과거 1855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정해진 것이지만 주로 메독 지방만을 분류한 것이기에 그 외의 지역은 거의 등급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이 그랑크뤼에 속하지 못한 와인의 일부는 "크뤼 부르주아" 급으로 약 240여개가 새로 지정되었는데, 오늘날엔 법률이 바뀌어 크뤼 부르주아를 표기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군요. 다시 말해 이 뻬이르 르바드 역시 크뤼 부르주아 급으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제법 퀄리티가 높은 와인인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와인은 꽤 평이 좋지 않은 편이더군요. 마셔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영 맛이 없어서 그냥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이 와인 때문에 라피트 로쉴드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나 맛이 없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직접 마셔볼 생각으로 한 병 구입해서 이렇게 마셔보게 되었습니다.

병을 개봉하여 잔에 따라 처음 한 모금 맛을 보는 순간... 왜 그리도 맛이 없다고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신맛이 두드러지고 촉감도 거친데다 전체적으로 떫은 맛이 너무 강해 도저히 빈말로라도 "맛있다."고 말하기 힘든 맛이더군요. 그래도 저는 이 맛이 어떤 형태로든 결국은 "열릴" 것이라 생각하고 반 병은 디캔터에,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그냥 가만히 두기로 했습니다.

디캔터에 옮긴 직후엔 솔직히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떫은 맛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신맛이 문제더군요. 이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35%, 메를로 65% 비율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이렇게 신맛이 두드러져서는 맛이고 향이고 거의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디캔터에 옮긴지 약 30여분 후, 이 신맛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고 와인 자체의 향긋한 향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떫고 시기만 하던 거친 맛도 점점 안정되어 살짝 달콤하고 코끝을 자극하는 스파이시한 향이 슬슬 피어올랐고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풀바디에 살짝 못 미치는 중간 정도 묵직함과 진하고 거무스름한 느낌의 자두나 커런트와 비슷한 과일맛에 달콤한 바닐라와도 비슷한 향이 코에서 맴돌고, 처음에 느껴지던 강렬한 신맛과 떫은 탄닌의 느낌은 와인을 목구멍을 넘긴 후 뒷맛으로 살짝 여운을 남기는 느낌으로 부드럽게 변했습니다. 이 맛이 나오는데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러한 맛이라면 이 가격대에서 그리 아쉽지 않은 만족감을 주는군요.

이렇게 디캔터에 옮긴 와인은 최소 30분 이상의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점 마시기 좋은 상태로 변해갔는데 그냥 병에 든 채로 남겨둔 나머지 와인은 3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맛이 열릴 생각을 안 하더군요. 분명 이 병에 남은 와인도 언젠가는 맛이 풀려나기 시작할 것이지만 솔직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상상을 못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해서 이 샤또 뻬이르 르바드라는 와인은 그냥 빨리빨리 마셔서는 절대 본연의 맛을 알 수 없는 와인이란 점입니다. 디캔터를 이용하든 아니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즐길만한 포텐셜을 갖춘 와인이 아닐까 싶군요. 실제로 이 와인은 최소 2030년도까진 보관이 가능한 장기숙성에 적합한 와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셔보거나 오랫동안 보관해두면 좋을 와인이라 생각합니다.

덧글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1/09/20 17:47 # 답글

    셀러 보관용 와인이군요. 아이를 낳아서 결혼할때쯤 따면 딱이겠네요^^;;
  • NeoType 2011/09/20 22:44 #

    사바욘의_단_울휀스 님... 가격대는 어지간한 중저가 와인들의 가격이지만 그냥 펑펑 따서 마셔버리기엔 상당히 까다로운 와인이더군요. 저도 셀러를 갖추면 하나쯤 다시 구입해 오랫동안 보관해볼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SJ 2011/09/21 04:39 # 삭제 답글

    디캔팅할 퀄리티의 와인을 마셔본 적은... 있습니다...ㅎㅎ 지난 주에 집앞 와인샵에서 56유로짜리 한 병을 친구랑 따 마셔봤는데 (그 친구는 한국에서 왔는데 와인 공부를 조금 하다 와서 그런지 "이거 한국 가격의 반값도 안해~"하고 환장(?)하더군요) 솔직히 전 걍 15유로짜리 뉴질랜드 말보로 밸리 피노누아나 10유로짜리 제이콥스 크릭 쉬라즈가 더 입에 맞더군요...ㅎㅎ 언젠가는 병당 100유로짜리 와인도 도전할 여유가 나겠죠...

    그리고 이 글을 쓰는 현재 저는 Bowmore 12년산 1리터를 면세점에서 들여와서 땄습니다. 제네바 면세점에서 37유로 하더군요...
  • NeoType 2011/09/22 01:30 #

    SJ 님... 1유로를 대충 1600원 잡으면 56유로는 8만원 중반쯤 되겠군요. 역시 유럽 본토는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싸게 먹히는 것이려나요. 솔직히 가끔은 비싼 와인들도 마셔볼만 하지만 평소 가볍게 테이블 와인으로 즐기는 것이라면 약 1~2만원대의 저렴하면서 입에 맞는 와인들을 마시는게 좋지요.^^

    보모어 12년이라... 저는 현재 면세점에서 산 17년을 가지고만 있고 아직 개봉을 안 했군요. 근데 보통 12년, 18년만이 있는데 17년이라는 녀석은 면세점용이 아닐까 싶어 살짝 아쉬운 녀석입니다;
  • azimazim 2011/09/21 16:24 # 삭제 답글

    오오, 디캔터도 나름 심오한 원리가 있나봅니다. 마의 30 분이라.

    일하시는 상황 때문인지 어떤지 점점 칵테일에서 와인으로 세대 교체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 아우라가. 'ㅂ';;

    그래도 덕분에 와인에 대한 지식도 얻고 좋군요!!

    + 언제 시간 되시면 염치 없사오나 위스키에 대한 정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년에 조주 기능사 처음으로 도전해보려 하는데 버번, 스카치, 싱글몰트 등 위스키를 잘 모르니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

    혹 설명이 잘 되어있는 사이트라도 있다면, 굽신굽신♡
  • NeoType 2011/09/22 01:30 #

    azimazim 님... 칵테일이나 위스키 이야기들도 중간중간 계속 다룰 생각입니다. 와인을 마신다고 와인 이야기만 쓰면 재미없지요.^^;

    위스키에 대한 정리라... 생각해보니 그런 주제로 써보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스카치, 버번의 대략적인 특성이나 대표적인 상표들, 싱글 몰트의 종류와 생산지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정리해보는 것도 꽤 보람있을 것 같습니다.^^
  • 2011/09/22 11:42 # 삭제 답글

    오.... 3만원 이하로 깨워서 먹으면 맛있는 와인이 있네요 ^^
    리뷰 써주신 덕분에 집근처 이마트 가면 한병 사올 것 같습니다~ ㅎㅎ

    아, 그리고 저는 디캔터를 삼각플라스크 사서 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년전에 어느 자주가던 와인동호회에서 괜찮다는 평을 보고, 오호! 싶어서 샀었죠.
    불위에 놓고 끓일수도 있으니 씻고 소독하기도 편하고 일단 가격도 싸구요 ㅎㅎㅎㅎㅎ
    나름 괜찮은 것 같더라구요~ ㅎㅎ
  • NeoType 2011/09/23 16:00 #

    농 님... 삼각플라스크라니 큰 것이라면 꽤 괜찮을 것 같군요.^^ 디캔터란게 사실 별게 아니라 와인과 접촉해서 맛이 변하지만 않으면 좋은 재질의 넓은 병이나 그릇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되니 굳이 유리일 것 없이 사기 그릇 같은 거라도 상관 없으니까요.

    중저가 와인이라도 프랑스 와인들은 거의 대부분 병을 따자마자 바로 마셔선 제대로된 맛을 내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디캔터를 쓰지 않더라도 마개를 열고 그대로 20~30분 정도 가만히 뒀다가 마시는 편이 어느 정도 맛이 정돈된 느낌이 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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