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RED] 마스 라 플라나 (Mas La Plana) 1989 by NeoType

안녕하십니까, 네타입니다.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 여유 있게 와인을 하나 땄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물건이지요.

예전에 이곳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던 스페인의 레드 와인인 토레스(Torres) 와이너리의 마스 라 플라나(Mas La Plana)의 1989년을 개봉했습니다.

마스 라 플라나... 예전에 이 와인의 2007년을 마시고 올렸던 글이 있었는데 거기서 언급했었던 1989년을 오늘에야 개봉했습니다. 모처럼 한가한 날이니 오래된 와인을 한 번 제대로 마셔보자~ 라는 생각으로 병을 열 결심을 했군요.

Mas La Plana란 "초원의 집"이라는 뜻의 와인으로 스페인의 동부, 바로셀로나 근방에 위치한 와인 생산지인 페네데스(Penedes) 지역에 위치한 동명의 포도원인 "마스 라 플라나"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입니다. 와인의 이름이 그랑 코로나스(Gran Coronas)라고 되어 있고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토레스의 그랑 코로나스라는 와인도 존재하지만 마스 라 플라나 포도원의 까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든 와인이기에 오늘날 판매되는 100%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인 마스 라 플라나와 동일한 종류의 와인이라 봐도 무방하지요. 여담으로 그랑 코로나스라는 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과 스페인 토착 품종인 뗌프라니요(Tempranillo)의 블렌딩입니다.

전에 마셨던 2007년.
정확히 말하면 저는 이 1989년을 구입한게 먼저이고 이걸 따기 전에 최신 빈티지를 마셔보자는 생각에 이 2007을 구입해서 먼저 마셔본 것이지요. 수입사 책정 소비자가 88000원이고 대략 7만원 중반대에 구입하긴 했지만 가볍게 구입하기엔 쉽사리 지불하기 어려운 가격대의 와인을 두 개나 사버린 꼴이었지만 토레스라는 회사에 흥미도 있었고 1989년쯤 되면 좀처럼 구하기 힘든 빈티지이니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2007년은 매우 만족스러운 맛이었지요.

1989년 빈티지... 그냥 써놓고 보면 별것 아니지만 딱 오늘 기준으로 약 23년 전에 만들어진 와인이라 생각하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군요. 89년이라면 저는 아직 유치원도 안 들어간 꼬맹이였는데 그때 만들어진 와인이 바로 이렇게 눈 앞에 있다 생각하면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듭니다.

오래된 와인이라곤 했지만 라벨은 매우 깨끗한데 병 뒷면 라벨에 쓰여 있는 내용에 따르자면 2004년 7월에 코르크를 교체했다는 내용이 적힌 걸 보면 그때 라벨도 새로 붙인 것이라 추정되는군요. 덤으로 내용을 더 옮겨보면 이 와인은 1989년 9월 19일에 수확한 포도로 최초 와인을 만들고 이를 프렌치 오크, 미국 오크 두 가지를 이용해 두 번 숙성시킨 후 1991년 2월에야 병입했다고 하는군요. 최초 와인 발효 기간을 생각해보면 최소 15~16개월 이상은 오크 숙성을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군요.

뭐, 이런저런 이야기가 길었지만 저는 이제까지 이 정도로 오래된 와인을 직접 다뤄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대략적인 지식일 뿐이지만 오래된 레드 와인은 기본적으로 침전물이 생길 것이고 그대로 병에서 잔에 따르면 침전물이 흔들려 병 전체에 퍼질 것이라 생각하고 디캔터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 와인을 구입해서 셀러에 넣은 후 이제까지 최소 5개월 동안은 손도 안 대고 그대로 눕혀 뒀으니 침전물은 병 한쪽에 잘 모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셀러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세워서 한 시간 정도 가만히 내버려뒀습니다. 좀 더 제대로 하자면 와인 바구니인 빠니에(Panier)에 눕혀두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저는 빠니에가 없기에 최대한 침전물을 가라앉히는 것에만 신경 썼습니다.

천천히 알루미늄 캡을 찢고 코르크를 빼냈습니다. 2004년에 코르크를 새걸로 교체했다는 설명처럼 코르크도 매우 깨끗한 편이었습니다.

그 후 디캔터를 놓고 파라핀 초를 켜놓고 천천히 비춰가며 와인을 디캔터로 옮겼습니다. 이때 촛불을 켜는 이유는 병 입구에서 따라져 나오는 와인에 침전물이 같이 나오는지를 잘 관찰하기 위함이군요.

천천히 와인을 디캔터에 옮기던 중 마지막에 침전물이 보이기 시작해 따르는 것을 멈췄습니다. 병 바닥에 약간 남은 와인에 침전물이 한가득 모여 있는 것이 보이지만 사진상으론 아무래도 제대로 보이진 않는군요.

디캔터에 옮긴 와인을 잠시간 그대로 둔 후 잔에 한 잔...
색상은 오래된 와인 특유의 벽돌색에 가까운 밝은 갈색이 돌긴 하지만 아직 충분히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신선하고도 맑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전에 마셨던 젊은 빈티지인 2007년에서는 진한 송로 버섯향에 습지가 연상될 정도로 짙은 나무향과 흙내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1989년에선 향 자체는 크게 두드러지게 퍼지진 않습니다. 대신 잔 주변에서 희미하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오래된 흙내음에 가죽 같은 향에 아직 이 와인은 힘차게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느껴지는 맛은 약간 산도가 올라오기 시작해 전체적으로 조금 신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직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맛이었습니다. 와인 자체의 질감은 매우 부드러워졌는데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풀바디감에는 못 미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무거운 나무향에 버섯향, 검붉은 자두가 연상되는 과실의 풍미, 희미하게 느껴지는 스모키한 여운 등 와인 자체의 본질과 개성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디캔터에 옮긴지 2시간이 지나도 맛 자체는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에 느껴지던 신맛이 점점 가라앉아 좀 더 마시기 쉬운 맛으로 변해갔습니다. 신맛이 가시자 와인 자체의 과실 풍미가 한층 직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23년이란 세월에서 오는 중후함과 오래도록 퍼져가는 긴 여운이 느껴져 정말 큰 포텐셜을 가진 와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이야기로 와인의 맛 자체는 단순히 "맛있다."라고 말하긴 힘든 맛입니다. 얼핏 느끼기론 신맛이 느껴지는 맛 없는 와인이라고 여겨버릴 수도 있는 와인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제 마실 수 있는 절정은 지나갔지만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마지막 한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한 와인이었습니다.

와인의 맛 자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렇게 오래된 와인을 직접 열어보고 다뤄보고 그리고 천천히 마셔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것만으로 큰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제 시중에서 이 마스 라 플라나 1989년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이런 와인을 구해서 직접 마셔봤다는 사실 한 가지는 확실히 남아있으니 저에겐 큰 의미가 있는 와인이라 할 수 있겠군요.

덧글

  • Kian 2012/01/29 03:16 # 삭제 답글

    이 와인(정확히는 포도이려나.) 저랑 동갑이군요(...) 보통 이런 와인의 세계는 뭔가 전문가들이 논해야 될 것 같은 포스의 와인인듯...ㄷㄷㄷ 아무렇게나 맛보기는(일단 사는거부터 ㄷㄷ)힘든 와인이라 눈 앞에 있다면 손을 달달달 떨거 같아요. 그런데 와인을 개봉 안하면 100년 후에 열어도 괜찮은가요? 증류주야 뭐 썩혀도 그 맛 그대로지만 이걸 잘못 보관해버리면 비싼 식초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쓰신 것에 신맛이 강하지만 살아있다고 하신 거 보면 신맛이 강해진 건 아마도 코르크 교환 할때 공기가 조금 들어갔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와인으로 식초 만들면 음식할 때 쓰기야 좋겠지만 저런 와인을 식초로 만들어버리면 눈에서 피눈물 나올 것 같아요(...)
  • NeoType 2012/01/30 12:21 #

    Kian 님... 오래된 와인은 저도 처음이었기에 여러 모로 긴장하게 되더군요.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도 일단 마시기 적합한 시기가 있기에 100년이 아니라 10년안에 병 안에서 꺾여버리는 것도 있으니 어지간한 퀄리티의 와인이 아니고선 장기숙성이 힘들지요.

    이 와인에서 처음 느껴진 신맛은 아무래도 슬슬 이 와인의 숙성의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재코르크하는 과정은 상당한 숙련을 쌓은 사람이 검증된 환경에서 행하는 것이기에 재코르크로 와인 맛이 변질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겠지요.

    솔직히 와인이 오래되어 식초가 되었다고 해도 애초에 식초로 만든 발사믹 같은 것이 아니라면 음식에 쓰기엔 그렇지요; 일부러 만들었다기보단 "맛이 가버린" 것에 가까우니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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